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서 내신 전교 10등에 들던 성적이었다. '이 정도면 학생부종합전형(학종)으로 승산이 있지 않을까?' 공학계열을 지망했던 박선우(23)씨는 22학번으로 서울 명문대 어문계열에 가까스로 진학했다. 하지만 못내 아쉬웠다. '수시 대신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바짝 공부해보면 어떨까?'
결국 선우씨는 반수를 택했다. 수능 전형이 있어 가능한 도전이었다. 학생부에 적힌 교과 성적이나 비교과 기록은 고교 졸업 후 바꿀 수 없지만 수능 성적은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첫 재도전에서는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는 않았다. 모의고사에선 수학이 분명 1등급이었는데 막상 수능에선 3등급을 받았다. 아쉬움은 더 커졌다. 아예 자퇴한 뒤 의약학 계열 진학에 특화한 서울 대치동 유명 학원 재수종합반에 들어가 3수를 시작했다. 정시 전형(수능 중심 전형)으로 의대에 합격한 수험생 중 절반이 이 학원 출신이라고 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기회라 생각하고 의대를 노려 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선우씨의 다짐엔 근거가 있었다. 서울대 합격생도, 성과급만 1억 원 넘게 받는다는 반도체 대기업 입사자도 결국 정년 없는 전문직인 의사가 되겠다며 재수종합반으로 돌아오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N수는 낭비가 아니라 이른 취업 준비'라는 걸 일찍 깨우쳤다. 3수 끝에 유명대 공대에 합격하고도 지난해 수능을 모두 다섯 번 봤다.
선우씨만의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2025학년도 수능에서 졸업생(N수생) 비율은 34.7%로 전체 수험생의 3분의 1을 넘었다. 약 10년 전인 2016학년도(23.3%)에 비해 크게 늘었다.
한국일보가 만난 N수생과 학부모들은 "현재로선 대입에서 믿을 건 수능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수능을 이토록 신뢰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압축된다. '현존하는 국내 대입 제도 중 가장 공정한 시험'이자 '이전에 공부를 못한 수험생에게도 재도전 기회를 주는 유일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학종의 불확실성에 질렸다... 수능이 가장 투명해"
'수능 선호론자'들도 이 시험이 완벽하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다른 대입 전형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공정하다고 여긴다. 서울 강동구의 일반고 1학년생인 딸을 키우는 이모씨는 아이가 공부를 곧잘 해 일찍이 학종을 준비하고 있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내신 대비 학원을 보내다가 최근 수능 대비 특강반에도 새로 등록했다.
"학생부 세부특기사항을 전문적으로 채우는 건 일반고가 특목고보다 불리할 거라는 불안이 늘 있어요. 아이 노력과는 무관한 거죠. 혹시나 학종이 잘 안 될 수 있으니 수능도 챙겨야해요."
적지 않은 학부모와 수험생들은 학종이 불투명한 전형이라며 불안해했다. 선우씨는 "학종은 아버지 도움을 받아 논문·봉사 스펙(경력)을 넣을 수도 있고 선생님 총애를 받으면 수행평가 때 좋은 점수를 얻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수능을 치른 자녀를 둔 박태양 전국학부모단체연합 공동대표는 "내신은 학습 능력이 비슷한 아이들도 어느 지역·학교에 다니느냐에 따라 등급이 천차만별로 나오다보니 객관적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니 학부모들 사이에선 '학종은 될놈될(학종은 될 놈이 된다)'이라는 인식이 만연해졌다고 한다. 합격할 아이는 이미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으로 만들어진 스펙에 의해 사실상 결정돼 있다는 뜻이다. 박소영 전 국가교육위원 겸 정시확대추진학부모모임 대표는 "불투명하고 정성적인 대입 평가 방식이 늘어날수록 부모 개입에 따른 격차가 심해진다"고 분석했다.
학종의 불확실성에 애끓이다 보면 오직 시험 점수로만 줄 세우는 수능의 평가 체계가 차라리 명확하다고 느낄 수 있다. 박태양 대표는 "그나마 공정한 정시 전형 비중을 70%로 늘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점수로 줄 세워 뽑기 때문에 대학에 왜 붙고 떨어졌는지가 명확하다는 점도 수능의 장점이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교권본부장은 "지금 학부모들은 (객관식 지필고사인) 학력고사 또는 초기 수능으로 대학 간 세대여서 우리 아이의 대입 당락을 받아들일 '납득성의 원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설명했다. 박소영 전 국교위원 역시 "수능은 불완전한 제도들 가운데 가장 투명하고 검증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 아이가 떨어지더라도 승복할 수 있다. 5수 끝에 의약학 계열에 진학한 뒤 6수까지 치른 송모(26)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세상에 (완전히) 공정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수능은 같은 날 정해진 시간 안에 모두가 새롭게 받은 똑같은 문제를 풀잖아요. 그것만큼 공정한 평가가 있을까요?"
"공부 못해도, 망해도, 얼마든지 다시 칠 수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가 수능을 놓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막판 뒤집기나 재도전 가능성을 열어놓은 시험이기 때문이다. 내신 전형은 고교 3년간 차곡차곡 쌓은 기록으로 평가받지만 수능은 단판 승부다. 언제든 각성해 공부한다면 누구든 의대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열려 있다.
경기 안양에서 올해 고3이 된 자녀를 키우는 이모씨는 "아이가 내신을 버리고 수능 '올인'을 택해 학원에서 수능 대비반을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수능에 전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하진 않거든요. 학종은 처음부터 공부를 잘해서 내신을 관리한 애들한테만 유리해요."
특히 웬만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는 현실 탓에 수능은 더 매력적이다. 박 대표는 "대학을 졸업해도 뾰족한 수가 없기에 아이들이 재수, 삼수를 해 1, 2년 늦게 졸업하는 걸 크게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N수생이 크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에게는 수능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다. 고교 내신이 5점대였다가 재수 끝에 지난해 정시로 수도권 대학에 입학한 양모(20)씨 역시 "수능은 딱 한 번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어 더욱 공정하다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수능이 수험생에게 주는 무한한 기회를 굳이 무력화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미숙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모임 상임대표는 "수능의 국어·수학·영어·탐구 과목만으로 아이들을 똑바로 (공정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도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통로를 다양하게 나눠 놓으면 적성에 맞게 선택할 수 있으니 수능도 하나의 통로로 남겨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N수·수능 신화'의 늪... 결국 고통은 수험생에게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수능에 응시하는 수험생이 많아지면서 '수능 성적은 시간·비용을 들이는 대로 정직하게 오른다'는 신화도 굳어지고 있다. 김원석 인천하늘고 교사는 "강남의 한 고교 교사가 우스갯소리처럼 '예전엔 수능 3·4등급을 받는 학생이 의대를 가는 건 어렵다고 봤었는데 6수를 해서 결국 의대 가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수능 신화'가 강해질수록 큰 부담을 지는 계층은 역설적이게도 수능을 신뢰하는 학부모와 수험생이다. 우선 학부모는 사교육비를 더 들여야 수능 대비가 잘 될 거란 압박을 외면할 수 없다. 안양의 학부모 이씨는 "학원에서 '이 정도 등급이 나오려면 특강을 더 들어야 한다'고 하니 수업을 더 (결제)하게 되더라"며 "(특강을 추가로 듣다 보니) 지난해엔 과목당 40만 원이었다면 이젠 과목당 80만 원이 들고, 국어·수학·영어를 듣고 있어 학원비가 월 300만 원 가까이 된다"고 했다.
기약 없는 수험 생활로 인해 겪는 고통도 당연한 사회적 비용이 된다. 3수 끝에 한양대 경영대에 재학 중인 김세현(23)씨는 "다들 똑같이 생각할 텐데 나 역시 '재수는 괴로워야 하 고, 괴로운 만큼 성적이 잘 나올 것'이라 믿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면 'N수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6수를 한 송씨는 "한의대를 목표로 수능을 여섯 번 볼 동안 매번 수학 1, 2문제가 발목을 잡았다"며 "돌이켜보니 수능 점수는 다 비슷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는데 고학력·전문직이 유리하다고 믿는 수험생들이 수능을 포기하지 못하듯, 현실을 먼저 겪어본 부모 역시 자식의 의지를 쉽게 꺾을 수 없다. 세현씨는 "워낙 공부를 열심히 했다 보니 부모님은 '투자하면 그만큼 결과가 나올 것'이란 식으로 믿어주셨다"고 했다. 선우씨 역시 "어머니에게 '이공계가 취업에 유리하다'거나 '의약학 계열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내 뜻에 다 공감해 지원해 주셨다"고 말했다.
고교 3년 스펙이 평생을 좌우할 거라는 두려움과, 그 스펙마저 부모의 배경이 필수라는 막막함. 특출나게 가진 것 없는 수험생과 학부모에게는 이제 수능으로 출세해야 한다는 믿음을 강화하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청춘을 갈아넣는 것 외에 별다른 수가 남지 않았다.
원문기사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11715030000502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서 내신 전교 10등에 들던 성적이었다. '이 정도면 학생부종합전형(학종)으로 승산이 있지 않을까?' 공학계열을 지망했던 박선우(23)씨는 22학번으로 서울 명문대 어문계열에 가까스로 진학했다. 하지만 못내 아쉬웠다. '수시 대신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바짝 공부해보면 어떨까?'
결국 선우씨는 반수를 택했다. 수능 전형이 있어 가능한 도전이었다. 학생부에 적힌 교과 성적이나 비교과 기록은 고교 졸업 후 바꿀 수 없지만 수능 성적은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첫 재도전에서는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는 않았다. 모의고사에선 수학이 분명 1등급이었는데 막상 수능에선 3등급을 받았다. 아쉬움은 더 커졌다. 아예 자퇴한 뒤 의약학 계열 진학에 특화한 서울 대치동 유명 학원 재수종합반에 들어가 3수를 시작했다. 정시 전형(수능 중심 전형)으로 의대에 합격한 수험생 중 절반이 이 학원 출신이라고 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기회라 생각하고 의대를 노려 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선우씨의 다짐엔 근거가 있었다. 서울대 합격생도, 성과급만 1억 원 넘게 받는다는 반도체 대기업 입사자도 결국 정년 없는 전문직인 의사가 되겠다며 재수종합반으로 돌아오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N수는 낭비가 아니라 이른 취업 준비'라는 걸 일찍 깨우쳤다. 3수 끝에 유명대 공대에 합격하고도 지난해 수능을 모두 다섯 번 봤다.
선우씨만의 특이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2025학년도 수능에서 졸업생(N수생) 비율은 34.7%로 전체 수험생의 3분의 1을 넘었다. 약 10년 전인 2016학년도(23.3%)에 비해 크게 늘었다.
한국일보가 만난 N수생과 학부모들은 "현재로선 대입에서 믿을 건 수능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수능을 이토록 신뢰하는 건 크게 두 가지 이유로 압축된다. '현존하는 국내 대입 제도 중 가장 공정한 시험'이자 '이전에 공부를 못한 수험생에게도 재도전 기회를 주는 유일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학종의 불확실성에 질렸다... 수능이 가장 투명해"
'수능 선호론자'들도 이 시험이 완벽하다고 믿지는 않는다. 다만 다른 대입 전형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공정하다고 여긴다. 서울 강동구의 일반고 1학년생인 딸을 키우는 이모씨는 아이가 공부를 곧잘 해 일찍이 학종을 준비하고 있지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내신 대비 학원을 보내다가 최근 수능 대비 특강반에도 새로 등록했다.
"학생부 세부특기사항을 전문적으로 채우는 건 일반고가 특목고보다 불리할 거라는 불안이 늘 있어요. 아이 노력과는 무관한 거죠. 혹시나 학종이 잘 안 될 수 있으니 수능도 챙겨야해요."
적지 않은 학부모와 수험생들은 학종이 불투명한 전형이라며 불안해했다. 선우씨는 "학종은 아버지 도움을 받아 논문·봉사 스펙(경력)을 넣을 수도 있고 선생님 총애를 받으면 수행평가 때 좋은 점수를 얻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수능을 치른 자녀를 둔 박태양 전국학부모단체연합 공동대표는 "내신은 학습 능력이 비슷한 아이들도 어느 지역·학교에 다니느냐에 따라 등급이 천차만별로 나오다보니 객관적이라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상황이 이러니 학부모들 사이에선 '학종은 될놈될(학종은 될 놈이 된다)'이라는 인식이 만연해졌다고 한다. 합격할 아이는 이미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으로 만들어진 스펙에 의해 사실상 결정돼 있다는 뜻이다. 박소영 전 국가교육위원 겸 정시확대추진학부모모임 대표는 "불투명하고 정성적인 대입 평가 방식이 늘어날수록 부모 개입에 따른 격차가 심해진다"고 분석했다.
학종의 불확실성에 애끓이다 보면 오직 시험 점수로만 줄 세우는 수능의 평가 체계가 차라리 명확하다고 느낄 수 있다. 박태양 대표는 "그나마 공정한 정시 전형 비중을 70%로 늘렸으면 좋겠다"고 했다.
점수로 줄 세워 뽑기 때문에 대학에 왜 붙고 떨어졌는지가 명확하다는 점도 수능의 장점이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교권본부장은 "지금 학부모들은 (객관식 지필고사인) 학력고사 또는 초기 수능으로 대학 간 세대여서 우리 아이의 대입 당락을 받아들일 '납득성의 원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고 설명했다. 박소영 전 국교위원 역시 "수능은 불완전한 제도들 가운데 가장 투명하고 검증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 아이가 떨어지더라도 승복할 수 있다. 5수 끝에 의약학 계열에 진학한 뒤 6수까지 치른 송모(26)씨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세상에 (완전히) 공정한 건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수능은 같은 날 정해진 시간 안에 모두가 새롭게 받은 똑같은 문제를 풀잖아요. 그것만큼 공정한 평가가 있을까요?"
"공부 못해도, 망해도, 얼마든지 다시 칠 수 있다"
수험생과 학부모가 수능을 놓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막판 뒤집기나 재도전 가능성을 열어놓은 시험이기 때문이다. 내신 전형은 고교 3년간 차곡차곡 쌓은 기록으로 평가받지만 수능은 단판 승부다. 언제든 각성해 공부한다면 누구든 의대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열려 있다.
경기 안양에서 올해 고3이 된 자녀를 키우는 이모씨는 "아이가 내신을 버리고 수능 '올인'을 택해 학원에서 수능 대비반을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수능에 전념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아이는 공부를 잘하진 않거든요. 학종은 처음부터 공부를 잘해서 내신을 관리한 애들한테만 유리해요."
특히 웬만한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는 현실 탓에 수능은 더 매력적이다. 박 대표는 "대학을 졸업해도 뾰족한 수가 없기에 아이들이 재수, 삼수를 해 1, 2년 늦게 졸업하는 걸 크게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N수생이 크게 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에게는 수능이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다. 고교 내신이 5점대였다가 재수 끝에 지난해 정시로 수도권 대학에 입학한 양모(20)씨 역시 "수능은 딱 한 번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어 더욱 공정하다고 느껴진다"고 말했다.
수능이 수험생에게 주는 무한한 기회를 굳이 무력화할 필요가 있느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미숙 학교를 사랑하는 학부모모임 상임대표는 "수능의 국어·수학·영어·탐구 과목만으로 아이들을 똑바로 (공정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면서도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통로를 다양하게 나눠 놓으면 적성에 맞게 선택할 수 있으니 수능도 하나의 통로로 남겨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N수·수능 신화'의 늪... 결국 고통은 수험생에게로
원하는 결과를 얻을 때까지 수능에 응시하는 수험생이 많아지면서 '수능 성적은 시간·비용을 들이는 대로 정직하게 오른다'는 신화도 굳어지고 있다. 김원석 인천하늘고 교사는 "강남의 한 고교 교사가 우스갯소리처럼 '예전엔 수능 3·4등급을 받는 학생이 의대를 가는 건 어렵다고 봤었는데 6수를 해서 결국 의대 가는 걸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수능 신화'가 강해질수록 큰 부담을 지는 계층은 역설적이게도 수능을 신뢰하는 학부모와 수험생이다. 우선 학부모는 사교육비를 더 들여야 수능 대비가 잘 될 거란 압박을 외면할 수 없다. 안양의 학부모 이씨는 "학원에서 '이 정도 등급이 나오려면 특강을 더 들어야 한다'고 하니 수업을 더 (결제)하게 되더라"며 "(특강을 추가로 듣다 보니) 지난해엔 과목당 40만 원이었다면 이젠 과목당 80만 원이 들고, 국어·수학·영어를 듣고 있어 학원비가 월 300만 원 가까이 된다"고 했다.
기약 없는 수험 생활로 인해 겪는 고통도 당연한 사회적 비용이 된다. 3수 끝에 한양대 경영대에 재학 중인 김세현(23)씨는 "다들 똑같이 생각할 텐데 나 역시 '재수는 괴로워야 하 고, 괴로운 만큼 성적이 잘 나올 것'이라 믿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원하는 결과가 안 나오면 'N수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6수를 한 송씨는 "한의대를 목표로 수능을 여섯 번 볼 동안 매번 수학 1, 2문제가 발목을 잡았다"며 "돌이켜보니 수능 점수는 다 비슷했다"고 말했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는데 고학력·전문직이 유리하다고 믿는 수험생들이 수능을 포기하지 못하듯, 현실을 먼저 겪어본 부모 역시 자식의 의지를 쉽게 꺾을 수 없다. 세현씨는 "워낙 공부를 열심히 했다 보니 부모님은 '투자하면 그만큼 결과가 나올 것'이란 식으로 믿어주셨다"고 했다. 선우씨 역시 "어머니에게 '이공계가 취업에 유리하다'거나 '의약학 계열에 진학하고 싶다'고 했을 때 내 뜻에 다 공감해 지원해 주셨다"고 말했다.
고교 3년 스펙이 평생을 좌우할 거라는 두려움과, 그 스펙마저 부모의 배경이 필수라는 막막함. 특출나게 가진 것 없는 수험생과 학부모에게는 이제 수능으로 출세해야 한다는 믿음을 강화하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청춘을 갈아넣는 것 외에 별다른 수가 남지 않았다.
원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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